金杉基 / 시인, 칼럼리스트
2000년 전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카네이션(incarnation,성육신)한 사람으로, 인성과 함께 신성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신(하나님)이기에, 예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원칙’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구조로 전개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가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온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어, 예수의 공의가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예수의 사역 현장에 부자들은 모이지 않고, 가난한 자들이 많이 모인 것은 맞는 얘기다.
그러나 예수가 공의 차원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으면서 오직 진리 편에 섰지만, 사랑 차원에서 배고픈 자에게 우선 빵 하나 준 것을 가지고 예수를 가난한 자 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예수는 고대사회의 잘못된 질서와 관행 그리고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기 위해 표면적으로 부자에게는 공의로, 가난한 자에게는 사랑으로 대했을 뿐,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가 한 쪽 편에 치우쳤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말은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와 똑같이 사랑을 베풀었고, 가난한 자에게도 부자와 똑같이 공의를 적용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만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국가나 정당도 부자에게는 공의의 잣대를, 가난한 자에게는 사랑(복지)의 잣대를 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헌법이나 정당의 당헌당규를 보면 어디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이 적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의 경우, 보수 정당은 부자를, 진보 정당은 가난한 자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표를 얻기 위해 노골적으로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누군가 사회 정의를 외치면 대체적으로 부자는 외면하고 가난한 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모였다.
부자보다 가난한 자가 많지만, 소수의 부자가 가지고 있는 힘이 막강하여, 부자는 기득권이 유지되기를 원했고, 가난한 자는 기득권을 갖기 위해 정의나 진리를 외치는 새로운 프레임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부자보다 가난한 대중의 힘이 더 강해졌고, 그래서 부자 보다 가난한 자가 더 기득권을 가지고 부자를 압박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가난한 대중의 힘이 막강한 지금 예수가 이 세상에 온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마도 예수의 사역 현장에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더 많이 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중을 이용해 막강한 힘을 과시했던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공의가 필요하고, 열심히 살면서 지칠 정도로 힘들게 일하는 부자(?)에 대해서는 사랑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나 정의가 부자나 가난한 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자나 가난한 자가 진리나 정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사를 보면, 부자나 가난한 자가 정당을 찾아가지 않고, 거꾸로 정당이 부자나 가난한 자를 찾아갔다는 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당이 선거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정당의 정체성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선동적인 정책만 내세우면서 유권자를 찾아가고 있으니, 우리 국민이 정당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표나 구걸하는 우스꽝스러운 정당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을 뽑는 4.7 재보궐선거가 60여일 남은 시점에서, 우리나라 정당이 예수의 사역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보수 정당은 부자 편만 들고, 진보 정당은 가난한 자 편만 드는 모습이 연출되어서는 안 된다.
2000년 전 예수처럼 정당도 공의와 사랑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아, 부자나 가난한 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국민 전체를 위한 정책으로 4.7 재보궐선거에 임해야 한다.
예수는 부자나 가나한 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고, 오직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다.
[단상]
성육신한 예수와 세상의 정당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정당이 예수의 사역에서 큰 교훈을 배우면 좋겠습니다.